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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저기서 살자, 미국서 날아온 흑인 선생님

김철수02 2009. 10. 22. 01:52

 

“뷰티풀 우도”(牛島=제주도 동쪽 섬)

연평초등 첫 원어민 영어교사 부코드씨 가족의 ‘해피 라이프’
 

발행일 : 2007.03.31 / 사회 A17 면

 
 
 

 

제주도 동쪽 성산포에서 배 타고 20분 가면 닿는 섬 우도(牛島). 고기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우도 주민 733가구 중엔 흑인 가족 1가구가 끼어 있다. 올해 개교 71주년 된 우도 연평 초등학교 첫 원어민(原語民)영어교사 클로딘 부코드(Claudine Boucaud·여·31)씨네 다섯 가족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살던 클로딘씨는 작년 9월 1일 남편 워렌 부코드(32)씨와 딸 나이아(10)·사하이(4), 아들 이사트(6)와 함께 1만㎞를 날아 이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우도에 거주자 기록이 시작된 1844년 이후 첫 외국인 주민이다.



◆섬마을 흑인 선생님

지난 26일 들판이 온통 유채꽃으로 뒤덮인 우도 서광리의 연평 초등학교 4학년 교실.

클로딘씨가 큰 소리로 “헬로, 에브리원(Hello, everyone)!” 하며 들어섰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하이(Hi)!” 하고 반겼다. 이날 배울 노래는 ‘오늘 날씨 어때요(How’s the weather)’. “하우즈 더 웨더 딩-어-링(ding-a-ling)… 오, 잇츠 서니(Oh, it’s sunny).”

이 학교는 전교생 77명의 작은 초등학교지만, 영어수업은 도시학교 못잖다. 클로딘씨는 월~수요일엔 연평 초·중학교에서, 목·금요일엔 성산포로 나가 성산·동남초등학교에서 수업을 한다.

뉴욕 출신 흑인인 클로딘씨는 휴스턴에서 초등교사로 일해왔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인 남편 워렌씨 역시 초등교사였지만 부인을 따라 우도에 왔다. 그가 홈스쿨링(home schooling·가정학교)으로 아이 셋 교육을 맡고 있다.


◆행복한 제주 생활

클로딘씨 가족을 이역만리(異域萬里) 외딴 섬 우도로 끌어들인 것은 ‘제주의 아름다움’이었다. 작년 여름, 인터넷을 뒤지던 워렌씨가 제주도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했다. 그는 아내에게 “여기로 휴가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아내 클로딘은 “휴가가 아니라, 여기로 이사 가자!”고 했다. 클로딘씨는 인터넷에서 교육부 원어민교사 프로그램인 EPIK(English Program In Korea)를 찾아내 정말 짐 싸들고 제주로 갔다.

이즈음 연평초 윤재일(59) 교장은 태권도학원 하나밖에 없는 우도 아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칠 원어민교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우도에 가려는 원어민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던 중 클로딘씨를 만났다. 윤 교장은 “성산포에 살면서 왔다갔다 하겠다”는 클로딘씨를, “바람 불어 배 못 뜨면 수업 못 한다”며 우도로 데려왔다.

우도면에서는 이들에게 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방 세 칸짜리 20여평 관사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집 앞마당 정면에는 한라산이 보이고, 왼쪽으론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동쪽 해변에서 일출(日出)을 보고, 반대편 바닷가에 나가 일몰(日沒)을 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본 적이 없어요.”(남편 워렌씨)

클로딘씨는 “순박하고 예의바른 아이들, 친절한 동네 사람들…. 무엇보다 범죄가 없어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녀는 작년 말 ‘제주 원어민교사 베스트 5’에 뽑히기도 했다.

◆성산 5일장에서 장보기도

그런 클로딘씨 부부에게 가장 큰 불편은 음식이었다. 두 사람은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다. 우도에 온 첫날, 윤 교장 부인이 푸짐한 아침을 차려줬으나 당근만 먹었다. 부부는 “사모님이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며 웃었다. 미국 수퍼마켓엔 콩만 12가지가 넘는데, 우도 야채가게엔 콩이 달랑 두 종류다. “두 달 전쯤 성산읍에 5일장이 선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닷새마다 성산포에 나가서 야채를 사오죠.” 부부는 관사 앞 작은 텃밭에 마늘, 시금치, 배추, 딸기도 기른다.

부부는 거실에 칠판과 책상을 놓고 자녀들을 직접 가르친다. 요리할 때는 재료를 세면서 수학을, 야채에 물 주면서 과학을 가르친다.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다 이용한다”고 했다. 부부는 “미국 아이들은 6살이 돼도 책을 못 읽지만, 우리 아이들은 4살부터 읽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뇌성마비 이겨낸 인간승리

클로딘씨는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났다. 세 살까지 제대로 걷거나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끈질긴 재활훈련으로 지금은 왼쪽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 장애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엄마는 내가 도전적으로 살도록 가르쳤어요. 흑인이고 장애아였기 때문에 나는 뭐든 남들보다 두 배 노력했죠.” 그녀는 미국 흑인 특유의 영어발음도 전혀 쓰지 않았다. “엄마가 그런 영어를 못쓰게 했죠. 어떤 피부색의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는 영어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원어민교사 계약은 올해 8월 말 끝난다. 그녀는 “우도에 더 있고 싶지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아프리카나 태국, 중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했다. “하늘에서 선물받은 ‘잘 가르치는 재능’을 마음껏 쓰고 싶다”고 했다.

성산포로 돌아가는 부두에서 이들과 헤어졌다. 남색 바다를 가르며 배가 멀어지는데, 다섯 명은 하얀 이를 반짝이며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우도=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