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_김정일사망]/국제_일반_11

[Daum 카페] 세계 2차대전의 경제적 배경

김철수02 2013. 1. 29. 23:52

 

 

 

 

 

 

 

 

 

 

 

 

 

 

 

 

내용 출처 : Germanistik ( http://cafe.daum.net/germanistik )

 

제목 : [유럽]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혁명의 획을 그은 2차 세계대전 발발원인,

          배경 및 역학관계에 대해서....

 

작성자 : 이동한(06학번)

작성일 : 2011.10.31

 

 

 

 

이제 1차 대전 이후 유럽의 획을 그은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 배경을 먼저 알아 보기로 하자.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에 시작하여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공격으로 절정에 이르러 1945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파란만장한 과정이었다. 인류는 1차 세계대전의 기억에서 체 벗어나기도 전에 또다시 전면전에 돌입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또다시 이 대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과 시련을 감수해야하였다. 여기서는 2차 세계대전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그 원인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또한 이 대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국제적인 상황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원인 및 배경

 

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다양한 역사가들의 견해가 있어왔지만 1914년 1차 대전의 기원만큼 다양하고 방대하지 못했다. 몇 가지 기원에 관한 역사가들의 서술에 대해서 살펴보면, 역사가 G..P 구치는 1940에 서술하기를 두 번째 전쟁의 죄는 히틀러에게 있다고 하였다. 이 의견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독일이 다른 나라들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또 어떤 다른 나라가 독일을 공격할 계획이었다는 암시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A.J.P 테일러는 『2차대전의 기원들』에서 ?히틀러 체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아직까지도 역사 논쟁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이루고 있다. 1935년부터 1941년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다. 즉, 2차 대전이 실제로 1차 대전의 연속이라는 의견과, 본질적으로 히틀러의 등장으로 나타난 별개의 전쟁인가 하는 등의 문제이다.

이처럼 전쟁의 기원들에 관해 제기된 많은 문제들이 연속성이냐 비연속성이냐 하는 유사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독일의 팽창주의 정책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당시 각 국의 경제적인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29년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유럽 전체를 휩쓸었으며 이는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해 주는 요인이 되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각 국이 실업과 경기침체에 직면하자 각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자국 생산자의 국내시장을 보호하려는 정책들이 실시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제적, 정치적 안정에의 기대들이 무너져 버렸고 모든 열강들은 자급자족과 경제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한 몇몇 나라에서는 대외적 팽창을 서둘렀고, 이것이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빚어내면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을 줄이고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무기 생산을 크게 증가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군비 확장은 경기 회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은 군수 공업을 중심으로 경제의 회복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원료, 연료 및 식량 수입이 막대하게 요구되었지만 독일은 이러한 수입 물자의 대금을 지불할 돈이 없었고 그 결과 만성적인 국제 수지상의 적자 문제가 나타났다. 독일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달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무력을 사용한 간접적인 결과들은 독일인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겨주었으며 여러 곳을 정복한 직접저인 결과로 로렌의 철광석과 방대한 양의 석유를 포함한 많은 원료들을 획득하게 되어 독일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결과적으로 대공황은 호전적인 팽창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를 한 셈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경제 불황으로 인한 군비 확장이 단순한 경기 회복만이 아니라 나치즘의 승리에 일차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나치즘의 팽창주의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히틀러 개인의 야망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히틀러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은 히틀러를 계획을 가진 인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히틀러가 침략의 청사진을 미리 만들고 계획했다는 것이다 즉, 히틀러는 체계적인 사상의 틀과 대략적인 외교 정책안을 가진 사람이며 그 시대의 긴급 상광과 기회들이 거기에 맞아들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서독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와 클라우스 힐데브란트는 히틀러가 하나의 대략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독일을 유럽 강국으로 복귀시키는 것, 동부에서 생활권을 확보하는 것, 유태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인종적 목적들을 달성하는 것, 마지막으로 세계 패권을 위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신유럽을 조직한 것이라는 여러 단계로 규정될 수 잇다. 즉 히틀러는 이전부터 철저하게 전쟁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독일 팽창을 향한 개인적인 야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 국민의 복수심

 

제 2차 세계재전은 1차 세계대전과 맞닿아 있다고 볼 때 그 원인은 1919-1920년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들의 결렬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1차 대전의 결과와 그 후 상황으로 인하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독일인의 복수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전쟁 후 1919년 파리 평화회의는 강대국들의 뿌리 깊은 전통적인 적대감을 해소시킬 근본적인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1차 대전은 끝났어도 전쟁의 원인은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제 1 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영토가 침공 당하지 않은 채 종전되었기 때문에 패배를 실감하지 못했고, 전쟁의 혹독함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잘 싸우고 있었지만 내부의 적들 때문에 지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으며 이런 반역자들에 의해 서명된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은 언젠가는 폐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빼앗긴 영토와 제한된 주권이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인들은 군부를 중심으로 한 독일군의 재건을 도왔다.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

 

전쟁 발발의 또 다른 원인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추구한 유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일방적으로 국제협약을 폐기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도발적 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형식적인 항의에 그치는 등, 사실상 독일의 침략행위에 대해 유화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유화 정책은 세 가지 공통적인 가정에 입각해 있었다.

첫 번째 가정은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의 대량살육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평화주의를 옹호했다. 따라서 그들은 나치와 파시스트의 의도가 공공연히 들어나는 것으로부터 애써 피하려 하였다. 둘째로는 많은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이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때문에 독일이 불만을 갖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끝으로 유화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완고한 반 공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독일로 하여금 이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소련 공산주의의 서진정책을 봉쇄할 장벽을 쌓은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한 서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유화정책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저지 할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즉, 이 두 강국은 대전을 치러 반대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독일의 진출을 받아주고 지원해줌으로 전쟁 없이 아니면 초기에 희생이 보다 적은 전쟁으로 독일의 진출을 멈출 기회들을 놓쳤다고 할 수 있겠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2차 세계 대전은 그 이전의 1차 대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유럽, 아시아, 미국 등에 남긴 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입은 각 국의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으며,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인한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서유럽 국가의 경제 파산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명이나 재산상의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2차 대전에는 1차 대전의 참호전과는 달리 전후방이 따로 없이 모든 지역이 전쟁의 참화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또한 고도의 과학기술을 응용한 값비싼 새로운 살상용 무기의 동원과 탱크를 비롯한 각종 기계화된 무기, 폭격기와 전투기의 사용, 심지어 전쟁 말미에는 원자 폭탄까지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값비싼 무기들로 각국은 적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차별적인 파괴에 나섰고 그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 교통과 수송 체계가 마비되었으며 공업 지대는 폐허가 돼버렸다. 이러한 물질적 피해는 파괴된 자산을 포함해 3조 달러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유럽은 1차 대전으로 받은 심각한 타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재차 세계 대전에 휘말렸으므로 인명과 재산 피해는 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전후의 인구증가로 인하여 유럽 각국은 심각한 식량부족에 시달렸으며 미국으로부터 들여올 소비재에 필요한 달러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각국은 모자라는 화폐 보충을 위해 더 많은 지폐를 찍어 내고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사태는 더욱더 악화되고 결국 혼란과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해 나선 유럽 각국의 발목을 잡았다. 즉, 2차 세계 대전의 결과는 대공황이라는 늪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던 유럽 각국이 생산력을 크게 후퇴시키고 말았다.

 

 

 

 

민족주의의 봉기

 

2차 세계 대전은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의 봉기를 양산하였다. 봉기의 대부분은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식민지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이로써 식민제국이었던 유럽의 각국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식민지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전후 세계 지배의 한 축을 형성하던 소련이 이데올로기상으로 탈 식민지화에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의 영향력은 한층 더 약화되었다. 탈 식민지화는 1945-1962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며 우선 1947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독립하면서 첫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1949년에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으며 프랑스는 전쟁 중에 시리아와 레바논을 상실하였다. 1951년에 일어나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회사 국유화 조치는 식민지의 독립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추세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영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1952년 이집트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통해 영국에 굴종적인 자세를 보여 왔던 파크루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후 수에즈 운하 회사의 국유화가 선언되고 이곳에 교역을 의지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운하 지역을 침공했으나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고 철수하였다.

 

 

 

 

미국의 등장

 

2차 대전 후의 세계 정치, 결국 전후 세계의 국가 간의 힘의 균형에서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미국의 부상이었다. 경제력을 기준으로 할 때 전후의 미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엄청난 격차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에 미국의 경제력은 전 세계를 압도하고 사상 최초로 최소한 지구반쪽에 대하여 경제, 군사적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지중해의 치안을 유지하고 서유럽에서 국제 정책의 개발을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1949년까지 임국은 인류의 사생결단을 내릴 수 있는 원자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전후의 소련

 

소련은 대외적으로 엄연한 2차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1948년까지 지상군 병력과 아울러 공군력도 세계 최대였으며 광물 및 석유 자원에서 소련은 가장 부유한 나라들과 비교해도 유리한 유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 내부의 실상을 전혀 달랐다.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물질적 피해와 인명의 피해로 파괴를 넘어서 거의 파국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은 제 2차 대전의 최대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차 대전과 더불어 소련은 강대국 간의 정치적 동등권을 토대로 한 대외전략을 실시하였다. 즉 소련이 서유럽에서의 미국과 영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반대급부로 미국과 영국 두 나라도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지배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에 대해 단호한 지배 의지를 표명했던 이면에는 경제적 요인 큰 역할을 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동유럽을 통해서 만회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동유럽에서 전개된 상황은 소련의 이러한 계획을 현실화하는 데 수많은 난관을 제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방측이 요구하는 대로 자유선거를 치를 경우 자신의 구상대로 전후 동유럽에서 친소체제를 수립할 수 없으며 결국은 소련의 영향력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또한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동유럽에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강압적 점령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들 동유럽 국가들은 예외 없이 소련과 유사한 경제구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

 

냉전의 시작은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자탄의 투하로 미국은 대일전의 승리를 주도할 수 있었으며 그 위력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게 되고 아시아에서 소련의 발언권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소련과 세계의 혁명 세력에 대해 위협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원자탄 투하는 2차 대전을 막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의 세계와 반 소련 공세를 목표로 하는 냉전을 개시하는 결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1945년 여름의 포츠담 회담은 종전과 전후 처리에서의 협력을 위한 전기의 마련이 아니었으며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회담이었다.

냉전을 초래한 긴장들은 다분히 양진영의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미국인들은 전쟁에서의 동맹자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데 환멸을 느꼈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했던 것처럼 서유럽 전역에서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경제적 취약성을 활용한 계획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또한 소련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력에 의해 포위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미국의 트루먼 및 마샬의 계획을 노골적인 형태의 신제국주의, 즉 미국의 경제적 패권에서 서유럽을 종속시키려는 계획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위에 내용으로 보듯이 2차 세계 대전은 정말 우리나라의 6.25 전쟁 보다 과정이 더욱 화려 하고 한 나라의 경제 상황 및 모든 여건 들이 변하는 것을 이번 자료를 찾으면서 보고 전쟁이 정말 나라를 이렇게 변하게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자료들중 미국의 활약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영향 이 끼치는 것을 알수 있다.

 

지금 현재 대한 민국 등 전 세계는 이러한 아픔을 겪고 성숙해서 현재의 이 위치 까지 현존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러한 역사 적인 아픔을 보고 지금 힘든 것에 대한 반성과 고뇌를 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며 좌절을 하지말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