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아르헨' 포클랜드 戰爭, 모두가 敗者 | ||||||||||||
독도海戰은 韓日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돼, 실효적 지배에 힘써야 | ||||||||||||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첫 경기인 벨기에 대 아르헨티나 전이 열린 날은 6월 14일. 공교롭게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영국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한 날짜가 바로 이날이다. 대회 출전 직전까지 군사정권의 실벌한 언론통제에 따라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스페인에서 전해들은 포클랜드 전쟁 참상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특히 개막전 하루 전에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아르헨티나군이 영국에 큰 패배를 당했다 소식에 모두들 숙소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대성통곡한다.
◇ '英國-아르헨티나' 영유권분쟁 중핵 '포클랜드 군도'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약 200마일 정도 떨어진 섬을 두고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분쟁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 섬을 '포클랜드'라고 부르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비나스'라 호칭한다. 동 포클랜드와 서 포클랜드라는 두 개의 초대형 섬과 나머지 200여개의 대소(大小) 섬들로 이뤄진 군도인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약 480Km, 영국과의 거리는 13,000 Km가 넘는다. 면적은 1만 2000㎢에 주도(主都)는 동(東)포클랜드섬의 스탠리에 위치하고 있는 포클랜드 군도는 인근 해역에 오징어와 흑대구, 새우 등 수산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영국의 북해유전과 비슷한 배사(背斜)구조여서 원유매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산업은 목양업(牧羊業)으로 사육두수는 60만 마리가 넘는다. 수목이 자라지 않으며 거의 불모지이거나 초원이어서 농산물은 재배되지 않는다. 이 제도는 1592년에 영국의 항해가 데이비스가 발견했을 때까지는 무인도였다.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화하려다 실패하고, 1832년 영국이 포경기지(捕鯨基地)로서 영유권(領有權)을 선언한 뒤 영국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남대서양의 중요한 영국 해군기지였고 부근의 해상에서 영국·독일 함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군정의 절정기였던 1982년 4월 2일 레오폴도 갈티에리 군사평의회의장 겸 대통령직무대행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포클랜드를 전격 무력 침공한 것이 포클랜드전쟁의 시발이다. 당시 '철의 여인'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급거 개전에 돌입했고 개전 72일 만인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전했다. 이 전쟁에서 양측은 1002명의 사망(영국군 256, 아르헨티나 746명)에다 부상자는 아르헨티나 1336명 영국군 777명에 이르렀다. ◇ 아르헨티나 패전은 '군사력 외교전서 공히 열세'의 귀결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영국의 여자 수상 대처를 깊게 보지 않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대처가 국방장관에게 영국 해병 파병에 걸리는 시간을 물었을 때, 장관이 석 달이나 경과된다고 대답하자 대처 수상은 '3일인가' 라고 반문하였을 정도로 그녀는 국방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럼에도 대처는 영국의 극심한 경제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40척의 해군기동함대를 출동시켰다. 아르헨티나 선공으로 촉발된 포클랜드전은 초기만큼은 아르헨티나 의중대로 진척되는 듯 했다. 거의 저항 없이 압도적 숫자로 섬을 수비하고 있던 영국군 소수 군대와 섬의 영국 관
얼마후 영국은 '정복자(Conqueror)' 잠수함을 앞세워 포클랜드의 전쟁에서 단일 건으로서는 가장 많은 362명을 전사시키며 아르헨티나 주력 구축함 제너럴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격침시켜 기세를 드높였다. 이 격침은 전쟁지역으로 선포됐던 금지구역 바깥에서 이뤄진 것으로 영국 정부는 불필요한 인명살상이라는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였다. 아르헨티나 역시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의 구축함들을 격침시키는 등 전쟁은 치열한 혼전 양상을 띈다. 아르헨티나 공군 조종사들의 우수한 조종술과 용감한 군인정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갈수록 우월한 무기로 무장한 영국의 우세로 기울게 된다. 결국 포클랜드에 상륙한 영국의 코만도와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이뤄진 육지전 끝에 당시 포클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주력군은 대부분 포로 신세가 된다. 전쟁이 시작된 지 75일째이자 82년 스페인 월드컵 개막 경기가 열린 날인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되고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영국은 발 빠른 기민한 외교로 전쟁 발발 몇 일만에 UN과 나토(NATO),유럽공동체(EEC)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아르헨티나 바로 이웃나라인 칠레의 피노체트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미국 측의 입장은 어떠하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레이건 행정부는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지리적으로 남미 아르헨티나는 북미 미국의 이웃이다. 그러나 이웃 편에 서기 위해 미영 동맹 관계를 배신할 수도 없었다. 결국 레이건은 대처 수상이 포클랜드 전쟁에 해군을 파병하는 것을 묵인해 줌으로써 영국 편을 들어주었다. 이때 레이건 대통령의 촌철살인적 화법은 "아르헨티나는 우리 이웃이지만 영국은 우리 친구이다"에 있었다. 더욱이 레이건 미 행정부는 아르헨티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정반대로 영국에 군사적 지원과 아르헨티나에 경제 제재 조치를 내린다. 이는 미국 정부가 남미에서 신뢰를 크게 상실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대조적으로 아르헨티나는 미국 대륙의 다수 국가들이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있었다. 미국 외교의 기본 기조인 '먼로 독트린'- 미대륙 국가들에 대한 유럽 지배나 그 연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과 1947년 미대륙 국가들끼리 체결했던,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서로 협력한다는 '리오 조약'를 철석같이 맹신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중간에 나서서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중재를 할 것이고 몇 가지 조건에만 합의하면 아마 그 땅은 국제적 지지를 받는 아르헨티나 수중으로 손쉽게 넘어올 것이라는 시대착오적 계산에 함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갈티에리 대통령의 탈환 계획이 유혈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여러 판단착오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훗날 증언에 따르면 개전 초기 포클랜드에 기습적으로 군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영국과 전면적 전투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군부 내부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국민들을 일거에 통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될 뿐 아니라, NATO에서의 역할 감소, 군비 축소, 장기적 경기침체와 인기 하락까지 겪고 있던 대처 수상이 대다수 영국 국민들에게 낯설기만 했던 머나먼 곳의 작은 섬을 되찾으려고 설마 그 먼 곳까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며 군대를 보내겠냐는 단견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 유럽의 식민지 각축장 '사연 많은 포클랜드' 아르헨티나 정부와 국민은 1833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 영유권도 함께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영국이 무력 점령한 후 자국민을 이주시켜 자치령으로 삼는 바람에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포클랜드 발견과 영유권을 주장하는 바탕에는 여러 주장이 있다. 먼저, 포클랜드 군도는 마젤란 탐험대의 사관이 16세기초에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1592년 8월 14일 영국 존 데이비스 함장이 발견했다고 주장되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일착으로 발견한 것으로 간주된다. 1527년과 1529년과 1541년 스페인 고지도에 포클랜드 군도가 명기된 것이 공식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네덜란드 항해가 '시볼드 드 워트'가 1600년 확실히 발견했으며, 드디어 프랑스 탐험가 '구앵 드 보샌느'가 1701년 남쪽에 있는 섬에 상륙했다. 영국해군 함장 우드 로저는 1708년 해군의 재무감 포클랜드 자작의 이름을 따, 그 섬을 '포클랜드 랜드'라고 이름지었으며, '포클랜드 군도'라는 이름은 1766년에 지어졌다. 그러나 이 섬 최초의 주민은 스페인도 영국도 아닌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항해사 '앙
프랑스에서는 이 군도를 프랑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배들이 떠나는 항구 '생 말로'(St. Malo)에서 '말루인 군도'(Malouines)라고 불렀다. 생 말로 어부들이 건너와 살게 되는데, 여기서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자기들끼리 부르는 섬의 이름 '말비나스'(Malvinas)가 유래된다. 부갱빌은 1767년 스페인 정부로부터 25,000 파운드라는 거액을 받고서 포클랜드에서 물러난다. 스페인 사람이 동 포클랜드 섬으로 옮겨올 때 영국사람들도 서 포클랜드 섬에 요새를 지었다. 결국 1769년 스페인과 영국은 서로 상대방에게 물러갈 것을 요구하면서 포클랜드 군도의 소유권을 따지기 시작했다. 1770년 7월 스페인이 무력으로 영국의 요새를 뺏자 마자영국인 거주민들마저 강제로 내쫓는다. 반면 영국은 당시 식민지인 오늘날의 미국과 전쟁도 있어, 1774년 포클랜드의 요새에서 떠났다. 1780년 스페인 군인들이 포트 루이의 이름을 바꾼 푸에르토 솔레다드(Puerto Soledad)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이후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연거푸 독립할 때까지 40년간 스페인 군은 여기에 머물렀다. 기록에 의하면, 스페인 정부는 1767년 4월 1일부터 1811년 2월 13일까지 20명의 총독을 보냈다. 식민 본국이었던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되어(1808년) 그 막강했던 힘을 잃자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16년,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820년, 최초로 포클랜드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 선포하게 된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독립하기 직전 아르헨티나정부는 자신이 스페인의 권리와 의무를 전해 받았다고 응당 간주하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삼게 된다. 드디어 1816년 7월 9일에 독립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1820년 쥬엣트가 함장인 '에로이나 (Heroina)'호를 보내 그 해 11월 6일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했으며, 1823년에는 안젤 파체코라는 사람에게 섬을 위탁했다. 1828년 아르헨티나는 최초의 아르헨티나 정착민들을 섬에 이주시키고, 도지사에 해당되는 정부관료 그리고 주둔군을 파견한다. 루이 베르네는 1828년 군도의 총독이 되었다가 1829년 6월 10일에는 포클랜드 군도의 정치와 군을 장악해 실질 총독이 되었다. 그 때 미국 전함의 함장 '실라스 던칸'이 개입한다. 포클랜드 총독 베르네가 미국의 고래잡이 배 세 척을 불법어로로 붙잡자, 1831년 미국 전함 '렉싱톤'호가 출몰하여 아르헨티나인들을 포로로 붙잡고 요새를 파괴했다. 이어 미국 함장은 포클랜드 군도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포클랜드제도가 영국령이 된 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포클랜드에 최초로 정착한 지 5년 뒤인 1833년부터이다. 1831년 영국 해군 '타인'(Tyne)호가 섬에 거주하던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모두 추방하자 1832년 영국인 탐험대가 섬을 접수하였고 곧 이어 1833년 1월 2일 영국 정부는 정식으로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영국은 천 명 이상의 자국민들을 이주시킨다. 1841년까지 영국 해군장교가 섬을 책임졌으며 1843년에 영국령이 되어 총독이 왔다. ◇ 현재 진행형의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 살펴본바, 끊임없이 이어진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간 영토분쟁은 1968년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당시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아르헨티나로 넘겨주는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은 1968년 7월 5일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이 합의된 날짜로부터 아르헨티나에 귀속될 것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130년 이상 끌어온 영토분쟁에 종지부를 찍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협상은 당시 포클랜드주지사였던 코스모 해스커드경이 BBC에 나와 "이 섬을 이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포클랜드 주민들을 규합을 이끌어냈다. 그는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협상을 공개해버렸지만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의 지지를 얻어 정부를 압박하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평화협상을 포기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 이관 협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평화적 협상을 포기한 대가는 14년 후인 1982년 전쟁으로 나타났다. 협상이 결렬된 후 아르헨티나에서는 영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격화되었고, 1982년 3월 26일 마침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전쟁을 결정하고 '로자리오작전'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4월 3일 안보리는 결의안 502호를 통해 양국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아르헨티나는 이를 즉각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74일간의 전쟁 끝에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6월20일 영국이 전쟁종료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포클랜드를 둘러싼 무력분쟁은 막 내리게 된다. 1999년 2월 30년간 비밀에 묻혀있던 포크랜드 양해각서가 공개되자, 협상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로드 찰폰터는 "그때 협약을 강행했어야 했다. 여론에 밀려 협약을 포기한 것은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현재로서 영토분쟁이 완전 종식이 된 것이 절대 아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영국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토를 빼앗아 갔다. 언젠가는 포클랜드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 16년만인 1998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서는 첫 영국을 방문했던 카를로스 메넴은 "이런 전쟁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도 "포클랜드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분쟁의 불씨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2003년 3월 16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탈식민 특별위원회'에 출석한 라파엘 비엘사 아르헨티나 외무장관은 말비나스(포클랜드 군도의 아르헨티나식 지명)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일은 헌법이 보장한 것으로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로이터 등 외신이 전했었다. ◇ '포클랜드 전쟁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비록 주민보다 펭귄이 더 많이 사는 군도라지만 근해의 석유와 남극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영국으로서는 포클랜드를 그냥 내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포클랜드의 현지 거주민들이 원한다면 주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공식 입장만 계속 반복하는 속사정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포클랜드에는 이미 150년이 넘도록 오로지 영어만 사용하는 영국 이민자들만 2,500여명 살아왔고, 영국군이 주둔하는 이상 즉, 아르헨티나 출신이 아무도 없는 데 아르헨티나로의 귀속을 원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를 독도 분쟁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시사점이 내포되어 있다. 현재 거주민이 거의 없는 독도에 우리 한국 정부로서는 이주 정책 등 실제 생활의 공간이 되도록 서둘러야 한다는 점이다. 포클랜드 전쟁은 전쟁에서의 패배가 한 나라에 정권 퇴진을, 승리가 다른 한 나라에 정권의 연장을 초래하였다는 점도 대조적이다. 아르헨티나 '칼티에리' 대통령은 종전 다음 달 사임하고 또 다시 군부 출신 비뇨네 장군이 뒤를 잇게 되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마침내 굴복, 다음 해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에서는 전쟁의 승리가 대처 수상에게 재집권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욕을 먹는 여인이었다. 강성 노조를 경찰 곤봉으로 진압하는 무자비성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단기적 경기 부양책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따라서 마녀로 풍자될 정도로 인기가 곤두박질 추세여서 재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승리가 영국 국민의 애국심을 한껏 고취하였기에 예상을 건너뛰고 극적으로 재선되었다. 사실,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어야 하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는 분에 넘치도록 충분했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이에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해 단기적 정서적 대응보다는 치밀하고 냉정하게 처신하는 것이 생산적 대처론 일 듯 싶다. 최대한 국내외 사료를 모으고 국제적 데이터와 기록들을 꾸준히 쌓아 가는 등 국제법 방어논리 개발을 촉진해야 한다. 또한 독도를 관광 패키지화 하여 우리 영토임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며 우리 영토로 확고하게 하는 인프라 구축이 조용하며 신속하게 응당 추진되어야 한다. 브레이크뉴스 광주호남 다른기사 보기 http://honam.breaknews.com | ||||||||||||
2005/04/06 [02:06] ⓒ브레이크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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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삐친머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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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_바다이야기] > 국제_일반_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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