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은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격돌한 페르시아 대군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트로이 전쟁 이후 두 번째 동서양 충돌이자, 이념으로 구분된 문명 사이 최초의 갈등으로 기억되는 페르시아 전쟁, 그 역사의 장으로 들어가 본다.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가 전쟁에서 거둔 모든 승리를 다 합친다 하더라도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테르모필라이 협로에서 패한 영광의 전투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승리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해도 말이다.” - 미셸 드 몽테뉴
“대지여! 그대 가슴에 묻힌 스파르타 병사들의 유골을 돌려주오! 300구 유골 가운데 세 개만이라도 돌려주어 두 번째 테르모필라이를 만들 수 있도록!“ - 바이런
“제국의 6군단은 스파르타의 300명 병사와 비견할 만했었다. 그들의 이번 항복은 독일군이 레오니다스가 되는 걸 방해하고, 나아가 제2의 테르모필라이로 기록될 영광의 패배를 놓친 것과 마찬가지다. 수치다.” - 아돌프 히틀러
스파르타의 젊은 왕 레오니다스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의 평정심은 바다와 같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수록 그의 침착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천하의 레오니다스도 세계 초강대국의 위협 앞에선 고민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다리우스 대왕의 정식 후계자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왕 중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 그리스 정벌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의 허약한 군사들이 기적에 가까운 선전을 펼친 마라톤 전투에서 다리우스 대왕의 그리스 정복 야욕이 물거품 된 이후 두 번째 위기다. 선왕의 못다 이룬 꿈을 마무리 짓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대 유럽 정벌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번 도발은 총력전의 양산을 띨 공산이 커보였다. 아주 잠시 동안, 그는 선왕이 물과 흙을 요구한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우물에 처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300>에선 레오니다스가 한 것으로 각색됐다)

지난달에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여기 스파르타에 모여 페르시아의 침략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헬라스 연합’의 수장은 바로 자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였다. 연합의 전신이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인 만큼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늑대 같은 스파르타에 운명을 맡기느니 페르시아에 투항하겠다”며 중립을 내건 아르고스 같은 국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겁쟁이들의 투정 따위에 일일이 신경 곤두세울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다. 레오니다스는 전쟁의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아폴론 여신관 신탁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신탁의 예언은 절대적이다. 스파르타의 법률과 전통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내비쳐온 왕은, 신탁이 이번에도 현명한 해답을 들려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파견 보냈던 사자가 신탁의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의외의 대답이 사자의 입에서 시처럼 흩어져 나왔다. “오, 광활한 들판의 스파르타 주민들아, 그대들의 운명을 들을지어다. 그대들의 훌륭하고 위대한 도시가 페르세우스의 자손들에게 파괴되든지 아니면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 죽어 라케다이몬의 전 주민이 애도하게 되리라.”
불길한 이야기다. 스파르타가 헤라클레스의 순수 직계 자손임을 자랑해온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신탁이 들려준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란 틀림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전통적으로 두 명의 왕이 존재했던 스파르타에는 레오니다스 말고도 레오티키데스 왕이 있었지만, 당대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닌 왕은 오로지 레오니다스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죽는다는 의미일까. 몇 달 후. 동맹군은 페르시아 제국군이 올림포스 산 발치의 도로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는 명목상의 사령관을 제외하면 이 함대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건 그들이 해상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내륙지방 국가인 데다 현재 신성한 올림피아 제전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제전 중에는 어떤 군사행동도 금지됐다. 스파르타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 레오니다스 왕은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육지라도 방어해야 이 가공할 심리적 부채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떠올렸다. 마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좁은 절벽 길. 인위적으로 빚었다고 해도 못 믿을 만큼 방어에 있어 최적의 환경을 자랑하는 지형조건. 이곳의 길목을 막아 사수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에 난입할 수 없다. 올림피아 제전 중이라 전 군을 동원할 순 없지만, 소수의 정예병사만을 데리고 가면서 중간 중간 주변 도시국가들의 군사지원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니다스는 전통적으로 왕의 근위대 역할을 하는 300명의 엘리트 부대 ‘히페이스’를 해산시키고, 집에 아들을 두고 있는 나이 든 퇴역병들을 중심으로 부대를 재편했다.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그리스 전역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300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나던 날, 라케다이몬의 드넓은 평원 위에서 레오니다스 왕은 일전의 불길한 예언을 떠올렸다. 신탁은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 죽든지 스파르타가 멸망할 것이라 했다.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의 조상 헤라클레스가 죽어 육신을 불태우고 신들에게 영혼을 바친 장소는, 공교롭게도 바로 지금 자신이 가는 곳, 테르모필라이 협곡 위 오이타 산 봉우리였다. 레오니다스는 살아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300>이 갖는 역사적 맥락의 중요성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들이 페르시아에 순순히 물과 흙을 바쳤다면 어떻게 됐을까(페르시아 제국은 굳이 군사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 나라의 물과 흙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속국의 예를 갖출 것을 종용했다. 아테네는 수십 년 전에 이미 물과 흙을 바쳤던 전력이 있었다). 서양의 수많은 학자들은 이 같은 가정 앞에 몸을 떨며 과도한 엄살을 부려왔다.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가 없었다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나아가 헬레니즘 시대나 로마의 문화 용광로 역할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즉, 최초의 동서양 문명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은 현재의 서양문명을 가능케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실제 유럽 국가들은 중세 이후 기독교 세계관의 급격한 쇠퇴를 겪으면서 십자군 전쟁 대신 마라톤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자신들의 이상향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300명의 근위대를 이끌고 장렬히 전사한 일화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숭고한 죽음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이란 헛된 것이다. 백 번 양보해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서양문명이 패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파괴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바빌론과 이오니아를 비롯, 모래알같이 많은 점령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특이한 정치제도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모반을 꾀하거나 제국의 위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페르시아의 절대적 미덕 중 하나인 ‘관용과 정의’를 그들의 점령국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냉혹한 거대 제국이었지만 아름다운 문화와 인류 보편의 도덕적 가치관을 가진 문명이었다. 물론 세계지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렇다고 현존하는 모든 미학적 가치와 도덕관념, 문화유산이 종이 쓰레기로 전락했으리라 말하는 건 다분히 서양 중심적 사고관에서 빚어진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 페르시아가 조직해온 범아시아 연합군을 괴물이나 기형, 장애집단으로 묘사하는 <300>의 풍경(물론 프랭크 밀러의 원작부터) 역시 이러한 일방적 시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파르타의 국가주의는 <300>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사실 역사 속 스파르타는 그 스스로 주장한 것처럼 헤라클레스의 자손으로 일컬어졌던 트로이 전쟁의 주역 스파르타가 아니었다. 영웅 아킬레스나 헬레네, 미넬라오스의 스파르타는 오래 전에 멸망했고, 당대의 스파르타란 저 멀리 북쪽의 도리스 지방에서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새롭게 만든 나라에 불과했다. 도리아인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던지라 트로이 전쟁의 매혹적인 이야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자신들의 역사 위로 신화를 덧칠해버린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스파르타인’과 ‘비스파르타인’으로 구분지어 생각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특히 스파르타의 엘리트주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병약하거나 심지어 못생긴 아이까지 아포테타이 절벽에 버려졌으며(아포테타이는 ‘폐기물 처리장’을 의미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되면 야생의 짐승처럼 거칠고 독립적인 완성체로 길러지도록 집단 양육됐다. 여자는 사춘기 이후까지 뚜렷한 성징이 없어 아기 생산을 원만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질 경우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지킨 300명의 병사들은 게르만 혈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도, 그가 생각하는 ‘제3제국’의 청사진이나 게르만 우월주의가 스파르타의 그것과 일맥상통한 덕이었다. 레오니다스의 희생을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켜낸 장엄한 대의의 실현으로 포장하는 일도 부질없는 노릇이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미련한 짓”이라 조롱해온 대표적 적대국이었다. 그들은 멸망할 때까지 원시적인 왕정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 속 스파르타와 레오니다스의 희생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날 역사의 현장 속에서 발휘된 신념과 보존의 정신, 충격과 공포를 이겨낸 의지의 발현이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대왕>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작가 윌리엄 골딩은 결코 긍정할 수 없는 스파르타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테르모필라이 협곡의 희생정신이 값진 이유를 “레오니다스의 부대가 역사의 바른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라며 “그는 희생과 용기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 의미를 깨우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만약 이 영화에서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다면 <300>은 서구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의 또 다른 총력전에 불과해질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풍광이 스크린 위로 겹쳐지면서, 살과 피로 빚어진 영웅 놀음은 비로소 체온을 가진 텍스트가 된다.
테르모필라이 협곡 최후의 풍경

테르모필라이의 가파른 협곡 사이에서 레오니다스와 연합 군대는 무려 나흘간이나 페르시아 군대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필라이까지 오면서 각국에 요청한 원조병력을 모두 합하자 5,000명의 그리스 중장 보병이 모아졌다. 하지만 300명의 스파르타 군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훈련이 돼 있지 않은 평민에 불과했고(노예를 제외한 스파르타 성인 남자들은 평생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전쟁이야말로 가장 편안한 휴식기간이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페르시아의 첩자들까지 종종 끼어 있었다. 다섯 째 되던 날 드디어 공격이 시작됐다. 크세르크세스로부터 최초 협곡 돌파의 임무를 부여받은 건 메디아인 부대였다. 하지만 스파르타 군대의 특징인 방진(8열 종대를 이룬 중무장 보병이 방패를 서로 맞물려 사각형의 밀집대형을 이루는 전략)과 접근전의 위력 앞에 페르시아의 선발대는 몰살당하고 만다. 결정적으로 메디아인 병사들의 방패가 약했고 창도 그리스 병사들의 것보다 짧았기 때문이다. 실로 마술 같은 승리였다.
살아 있는 메디아인 병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됐을 무렵 페르시아 최정예 부대인 불사부대원들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부대를 전선 맨 앞으로 불러들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친 게 바로 이때다. 그들은 방심한 듯 진열을 깨고 후퇴하다가 레오니다스의 신호와 함께 몸을 홱 돌려 일순간 방진을 맞추며, 쫓아오는 페르시아 군대를 난타하기를 수차례 되풀이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많은 사상자는 둘째 치더라도 당장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어린애 부리듯 전투에 임하는 스파르타 군인들의 모습에 기가 질려버렸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무리 부대를 투입해도 이대로는 별 승산이 없다는 생각에 일단 퇴각을 명령했다. 레오니다스는 잠시 희망을 느꼈다. 이렇게 조금만 더 버티면 올림피아 제전이 끝나고 스파르타의 전 군이 진격해오지 않을까.
하지만 헤라클레스의 자손이 죽으리란 신탁의 예언은 어긋나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지방의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군대를 찾아가 “산등성이 넘어 테르모필라이로 통하는 길이 있다”며 적국의 길 안내까지 맡는 매국행위를 한 것이다. 사실을 안 레오니다스는 개죽음을 당할 것을 확신해 동요하는 동맹군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테르모필라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동맹군까지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동맹군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협곡에는 일부 고집스런 병사들과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당초 300명이라는 셈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스파르타의 노예 ‘헬로트’들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병사들까지 합쳐 1,500명이 남았다. 날이 밝자 레오니다스가 저 유명한 말을 꺼냈다.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게 될 것이니,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어두도록 해라.”
협곡 코앞까지 사방측면으로 돌진해온 페르시아군의 파상 공세는 엄청났다. 레오니다스 왕은 일찌감치 전사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살아남은 그리스 병사들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했지만 하루 안에 모두 몰살당했다. 그들은 빗발치는 화살을 몸으로 맞아가며 칼이 부러지면 칼자루로, 칼자루가 없으면 이빨로, 주먹으로, 손톱으로 싸웠다고 전해진다. 시체가 쌓여 산이 될 즈음, 테르모필라이 협곡은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차지가 됐다.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군대는 전사한 적장을 훌륭히 장사 지내주었으나, 사상 최악의 적 앞에선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의 머리를 잘라 눈을 파내고 말뚝에 박았다. 그리고 이것을 아테네로 향하는 길목에 세워두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의 군대가 지연시킨 시간과 페르시아에 안겨준 강렬한 인상은 그리스의 전세에 확실한 호재로 작용했다. 역사는 이 전쟁이 살라미스 해전과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 이후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파르타 왕의 영웅적 죽음은 전 그리스를 단결시켰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몰살당한 모든 영혼들과 함께, 그것은 전설이 됐다.
참조자료: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ㅣ책과함께) |